문신.

타투라는 단어가 타투라는 단어보다 더 세련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타투라고 불릴 때보다 사람들의 인식이 포용력이 높아진 것도 그 세련미에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문신을 하고 싶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 언제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 ‘오, 멋지네요.’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타투를 하게 된다면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오각형의 별 모양이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막연한 희망은 구름처럼 뇌리를 맴돌았을 뿐 현실이 되지는 못했다.

20대에는 암울한 미래 앞에서 감히 그 두 단어를 떠올릴 여유도 없었고, 30대에는 여느 월급쟁이들처럼 일과 인간관계에 고군분투하며 다른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40대는 남들처럼 안정적인 삶에 접어드는 시기에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상담을 받았고, 덕분에 직장도 쉬었다.

동시에 지옥 같은 직업과 일에서 해방된 시간에 ‘나’와 화해와 용서를 시도하는 것에 대한 만족감과 긍지, 기쁨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내가 원하는 것에 집중하자’라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어쩌면 삶의 뻔한 슬로건과 함께 드디어 문신을 새긴다.



한쪽 팔에는 나에게 의미 있는 문장을 새겼고, 다른 쪽 팔에는 나에게도 의미 있는 문양을 새겼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룬 최초의 기념단추 같은 이 타투는 어디선가 특정인의 눈에 띄지 않도록 팔목을 낮췄다.

문신에 대한 나쁜 인식과 문신을 한 사람에 대한 자체 검열을 했고, 모자이크 처리까지 열심히 했다.

오랫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신경을 써서 내가 원하는 것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슬픔, 분노, 답답함을 억누르고 억눌렀고, 나는 무기력과 무감각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뎠다.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나를 먼저 생각하겠다고 다짐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나는 내가 못생겼든 착하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법, 모든 문제에 대해 나 자신을 탓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기 비난 자신있게 부메랑을 다른 방향으로 던지는 방법’. 또한 ‘나를 잔인하고 가혹하게 괴롭힌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언제나 나에게 진실할 것이다’ 등 한 걸음 한 걸음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인 걷기 연습을 하고 있다.

(어릴땐 귀여웠는데..)

오늘은 폭포가 많은 날이었습니다.

내일 더 나아지고 싶습니까?

별이든 불가사리든 그게 나라면 그냥 살면 된다.